“만남과 이별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오사키 요시오 ‘파일럿 피시’

사람은 한 번 만난 사람과는 두 번 다시 헤어질 수 없다. 인간에게는 기억이라는 능력이 있고, 따라서 좋든 싫든 그 기억과 더불어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 어딘가에 그 모든 기억들을 담아놓는 거대한 호수 같은 곳이 있고, 그 밑바닥에는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무수한 기억들이 앙금처럼 쌓여 있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잠에서 막 깨어 아직 아무 생각도 없는 아침, 아주 먼 옛날에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기억이 호수 밑바닥에서 두둥실 떠오를 때가 있다.”(11쪽)

“인간이 감성의 집합체에서 기억의 집합체로 옮겨가는 시기, 그건 어쩌면 우리 같은 사십대 무렵이겠다 싶더군. 어쩌면 서른 무렵부터 서서히 시작됐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아마도 모리모토 네가 잘못 짚은 것은 그 기억을 쫓고 추격해서 그것과 대치하려고 드는 생각이 아닐까. 그렇지만 제아무리 술을 마시고 뭘 어쩐다 한들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싸울 수도 없어.”(79쪽)

일본 소설가 오사키 요시오에게 제2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안겨준 작품 ‘파일럿 피시’가 보라나비 저작 번역상을 수상한 이영미 번역가의 번역으로 재출간됐다.

이 작품은 깊은 수족관 속에 가라앉은 기억을 되새김으로써 만남과 이별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지 묻는 청춘연애소설이다.

이야기는 월간 ‘이렉트’라는 포르노 잡지의 편집장인 주인공 야마자키가 어느 날 새벽, 자신의 집 열대어들이 헤엄치는 투명한 수조 앞에서 19년 만에 걸려온 옛 애인 유키코의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40대가 된 야마자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단숨에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런 자신에게 놀란다. 그 전화를 계기로 야마자키는 잘 조성된 인공의 수족관 같은, 현재 자신에게 담겨진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과 사랑 그리고 상실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다.

젊은 날의 감정과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19년 만에 옛 애인을 만났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나 3년간 연애하다가 이별하고, 시간이 흘러 19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됐다.

주인공 야마자키와 유키코는 과거 속 자신들의 기억과 사랑이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반응하는 수조 속 미생물’이었음을, 완벽한 수족관 생태계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물고기, ‘파일럿 피시(Pilot Fish)’였음을 깨닫는다.

“예를 들면 말인데, 수족관 상급자가 아로와나나 디스커스 같은 값비싼 물고기를 샀다고 치자. 비싼 물고기들은 대체로 신경질적이고 약해. 그럴 때 그런 물고기들을 위해서 미리 파일럿 피시를 넣어서 물을 만들어주지. 앞으로 넣을 값비싼 물고기와 최대한 비슷한 환경에서 키운 물고기를 골라서 말이야. 그리고 물이 만들어질 때를 가늠해서 원래 넣으려고 헀던 물고기를 옮겨와. 그리고 파일럿 피시는 버리지.”(36쪽)

“하지만 난 이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건 야마자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야. 옳다고 믿고 걸음을 내디딘 길을 한 번도 되돌아간 적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 게다가 만약 한 번 그랬다간 두 번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어.”(232쪽)

야마자키와 유키코에게 헤어져 있던 시간 동안은 서로의 기억 속에서 미련으로, 해결되지 않은 미제로 남아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억’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독자는 책 자체의 이야기 전개와는 상관없이,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사건이나 서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독자 자신의 지나간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온 만남과 이별, 과거의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옮긴이 이영미는 “어떤 식으로 헤어졌든 헤어진 그 누군가의 기억은 영원히 남는다”며 “그 누군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꾸준히 성장하며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아니, 굳이 기억을 들춰내지 않더라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한 번 만난 사람의 실제적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온전히 자기 힘으로 운명을 개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도 분명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운명이 달라진 순간은 있을 것이다”며 “때문에 만남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사람의 운명을 꽤 많이 결정짓는다”고 덧붙였다.